젠더 갈등의 프레임을 넘어서
이 영화를 젠더(gender)간 갈등의 측면으로 접근한다면 아마 타협의 지점을 찾지 못하고, 끝이 없는 논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몇몇 유명인들이 이 영화를 보았다고 SNS에 올리는 것만으로 엄청난 악플에 시달렸던 것을 보면 안타깝지만 이 시대의 아픔들이 어떤 한 쪽의 성별에만 선택적으로 찾아오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비극적인 시대는 모두가 아프고, 모두가 힘들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도 다 힘들다. 김지영의 남편은 어찌 안 힘들겠으며, 김지영의 아빠나 남동생, 심지어 공유의 회사 동료들, 그 누구라도 고민이 없겠으며 힘들지 않겠는가. 다만 영화와 이 영화의 원작은 이 시대의 아픔들 중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아픔을 다루고 있는 것 뿐이다. 여기에 공감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누구에게 강요할 사항이 아닐 것이다. 다만 나는 여성들뿐 아니라 특히 80년대에 태어난 남성들이 이 영화를 보는 것을 매우 추천한다. 단 몇 시간동안만이라도 남성의 시각을 잠시 내려놓고, 나의 힘듦을 내려놓고, 80년대에 태어난 김지영이라는 여성이 되어본다는 것은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갈 수많은 동년배의 여성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왜 여성만 이해받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남성들도 이해받아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급변하고 있는 사회적 인식 속에 어디에 자리잡을지 몰라 헤메는 남성들은 어찌보면 가치 기준을 상실한 상태로 일종의 ‘아노미’ 현상을 겪는 중이다.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급변하고 있는 사회적 인식 속에 어디에 자리잡을지 몰라 헤메는 남성들은 어찌보면 가치 기준을 상실한 일종의 ‘아노미’ 현상을 겪는 중이다.
※ 이후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특수하지 않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캐릭터는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리 나쁘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교대를 선택한 언니 덕분에 집안의 지원을 받아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지영의 엄마처럼 다른 식구들을 위해 자신의 학업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원하는 회사에 취업까지 성공했다. ‘남의 편’이라서 ‘남편’이라는 세간(世間)의 흔한 인식을 비웃듯이 영화 속 김지영의 남편은 늘 ‘김지영의 편’이다. 사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80년대생 여성들과 비교해보아도 객관적으로 유난히 열등하거나 힘들만한 부분은 없다.
이것이 영화의 의도이다. 김지영 개인의 특수한 상황으로 몰아간다면 그저 ‘case drama’로 읽혔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김지영을 둘러싼 주요 변수들을 사회적 평균 수준 이상으로 제시했다. 김지영은 신파류 드라마에 나오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들과는 다르다. 김지영의 남편은 술고래도 아니며 폭행을 일삼거나 도박빚을 지지도 않았다. 영화는 이로써 김지영이 힘든 이유가 개인적 케이스가 아니라 ‘시대’와 ‘구조’가 만든 ‘사회적’ 아픔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 김지영은 사회적 평범성을 지니고 있기에 ‘유난을 떤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 정도면 괜찮구만. 뭐가 힘들다고 왜 혼자 유난이야?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 김지영은 사회적 평범성을 지니고 있기에 ‘유난을 떤다’는 비난을 받는다.
'82년생 김지영'의 가정 내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남편이 설거지를 하려고 고무장갑을 낄수록, 선진국 수준의 제도에 발맞추어 남편이 육아휴직을 내려고 할수록, 용기를 내어 경력 단절을 극복하려고 발버둥칠수록 김지영의 삶의 질은 오히려 곤두박질친다. 사회는 김지영이 김지영의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아들이 고무장갑을 끼자 시어머니는 ‘좋은 남편’이라고 추켜세워 우회적으로 김지영을 비난한다. 게다가 앞길이 구만리인 아들이 육아휴직을 한다고 하자 그 비난의 화살을 김지영의 복직에 돌린다. 골목길에서 성적인 위협감을 느낀 지영에게 친정 아버지는 여자가 피해다녀야한다며 그 위협감의 책임을 김지영에게 덧씌운다.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지영이 졸업식에 가지 않겠다고 우울해하자 ‘여자는 시집이나 가면 그만’이라고 하는 것 역시 한 지붕 아래 있는 친정 아버지다. 명절에 만나는 고모들 역시 막내 아들에게 집안일을 시키는 은영과 지영을 나무라며, 지나가는 비혼의 행인들마저 ‘나도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커피나 사 마셨으면 좋겠다’며 비아냥거린다. 아직 우리 사회는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 커리어를 가지거나 홀로 커피를 마시는 것조차 마음으로 허락이 되지 않는 사회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명절에 만나는 고모들 역시 막내 아들에게 집안일을 시키는 은영과 지영을 나무란다
2019년의 김지영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필자는 84년생이다. 자라면서 아버지들이 주방에 있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자란 세대이다. 집안마다 문화가 달랐겠지만 나는 동네 할머니들로부터 ‘남자가 그런데 들어가면 XX 떨어진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80년대생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성역할에 대하여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직·간접적으로 접하며 자랐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런 유년기의 상황에 대하여 여성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겉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불만으로 쌓여갔을 가능성이 높고, 이에 반해 남성들은 그러한 성역할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80년대생들이 20대와 30대를 보내는 시간동안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롤러코스터에 탄 것처럼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90년대만해도 담배를 멋있게 피우는 마초적 캐릭터들이 브라운관을 채웠지만 21세기에 접어들 무렵부터 순백의 얼굴을 한 아이돌들이 브라운관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회식에서 부장님이 하는 성적인 농담들은 맥주에 따라 붙는 오징어 안주처럼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부장님들은 마음만 먹으면 강제추행으로 신고해서 응분의 댓가를 치르게 할 수 있다.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롤러코스터에 탄 것처럼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사회적 인식이 변하면서 그에 따라 법과 제도가 달라졌다면 혹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법과 제도가 먼저 변했다. 그리고 이에 따른 개인들의 인식들은 개인들의 판단에 맡겨졌다. 2009년 당시에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성평등 인식도 조사 결과만 보아도 초등 남학생들의 성평등 인식이 기성세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009년에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성평등 인식도 조사에서는 초등 남학생들의 성평등 인식이 기성세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000년대생들의 성평등 인식이 이 정도였다면 80년대생들은 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질 것이다. 어떤 이들은 부모님 세대의 성역할론에 강력하게 동의하고 있을 수 있고, 어떤 이들은 사회적 변화에 보폭을 맞추었을 수 있다. 필자도 결혼을 하면서 스스로 가지고 있던 성역할의 개념을 끊임없이 수정해나갔다. 여전히 몸에 배어있는 성역할 인식이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게 여기는 지점은 있지만 그 지점까지 나아가는 속도는 스스로 보아도 많이 더딘 것 같다.
한국 사회, 내 기준에서 상대방을 단죄하는 법정
우리가 살아가는 2019년, 사람들은 본인이 서 있는 스펙트럼의 한 지점에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나는 80년대생 동년배들에 비해 가사 참여를 많이 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아내가 육아의 대부분을 감당하고 있고, 나는 가끔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거나, 설거지를 하는 수준에 머무른다. 아이들과는 잘 놀아주려고 하지만 그것도 주말의 경우지 평일에는 퇴근하고서는 아이들 씻기고 재우기 바쁘다. 그러나 기성세대들 사이에 가면 그 몇 안되는 일들로 인해 ‘좋은 남편’ 소리를 듣는다. 반대로 아내는 하루 종일 아이들 둘과 씨름을 해도 그런 사회적 칭찬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그저 ‘당연한 것’이다.
필자는 이 모든 것들이 급격한 사회 변동의 진통들이라고 여겨진다. 무지막지한 사회 변동과 그에 따른 개인의 인식 차이들이 빚는 크고 작은 갈등들 속에 82년생 김지영들은 그저 한 번 ‘그렇구나’하고 이해 받으면 그만인 ‘별 것 아닌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우울에 이른다.
그런 김지영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남편들의 입장도 난감하다. 남편들도 직장에서 고군분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아버지 세대에 비해 가정에 투여해야 하는 에너지도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내에게 잘 해주려 노력한다 해도 개인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는 ‘구조’의 문제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기성세대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고, 직장에서 여성 친화적 제도가 정착화되는 것도 수십년은 지나야 할 문제인데다가 80년대생 여자들을 끊임 없이 스테레오타입으로 박제시키는 사회적 프레임(빠순이→된장녀→맘충)도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다. 정말이지 아내 편 한 번 들어주기도 쉽지 않은 사회다.
80년대생 여자들을 끊임 없이 스테레오타입으로 박제시키는 사회적 프레임(빠순이→된장녀→맘충)도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다.
영화가 제시하는 답변
영화가 김지영에게 ‘사회적 감옥’에서의 탈출을 제시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한 가지는 친정 아버지가 여자는 ‘시집이나 가면 그만’이라고 했을 때, 친정 엄마가 보였던 반응이다.
지영아, 뭐해? 나대! 막 나대!
사회적으로 이해를 받든 그렇지 않든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표출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여겨진다. 심리상담치료를 하는 의사도 비슷한 조언을 한 듯 하다. 까페에서 자신을 향해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냥 참지 않고 ‘저를 아세요?’라고 항거하는 것.
그리고 지영의 친정 엄마는 영화의 말미에서 지영을 안아주며 '너 하고 싶은 거 해'라며 지영에게 정말로 필요한 유일한 대답을 한다.
영화는 이렇게 사회적 계몽도 아닌 개인의 정서적 탈출법까지만 제시하고 막을 내렸다.
영화는 사회적 계몽도 아닌 개인의 정서적 탈출법까지만 제시하고 막을 내렸다.
'여성'의 영화이기 전에 '이해'의 영화
영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이러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 사람이 되어본 적이 있었던가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의 영화이기 이전에 '이해'의 영화이다. 그 대상이 이번에는 80년대에 태어난 여성이었을 뿐이다. 여전히 사회에는 사각지대에 놓여 조그만 일상의 조각조각조차도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의 가치관들이 심하게 변동할 때 가장 필요한 역량은 소통과 이해이다. 서로가 살아가는 방식들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힘들었겠다’ 정도의 마음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그게 힘들면 그냥 내버려두기만 해도 괜찮다.
82년생 김지영은 어쩌면 당신이 특이하다고, 유난하다고 여기던 그 사람의 이야기일 수 있다. 당신이 그 또는 그녀의 입장에서 한 번만 더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영화는 법으로 정한 왠만한 의무교육보다도 더 훌륭한 값어치를 하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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