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관점의 필요
사람은 엄청난 노력을 들이지 않는 한, 보이는대로 들리는대로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한 가지 매체만 보고 들은 사람들은 그 정보제공자가 제공하는 프레임에 갇혀버리기 십상이다.
매번 보던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본다면, 매번 듣던 것만 듣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듣는다면, 기존에 갖고 있던 정보와 새로운 정보가 서로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충돌이 있어야만 사람은 기존의 프레임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세계관에 새로운 정보를 융합하여 새로운 프레임을 갖게 된다. 이러한 작업을 자주 진행하는 사람일수록 스스로를 보는 눈도, 사회를 보는 눈도 생기게 마련이다.
'한국 전쟁' 역사를 떠올릴 때,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
영화 ‘아일라’는 나에게 프레임의 전환을 할 수 있었던 좋은 영화였다. 우리에게는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라는 이름보다 ‘6·25 전쟁’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념의 대립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거나, 가족과의 생이별을 경험하고, 피난을 가야했던 역사. 우리의 아픔이 너무나 절절하기 때문에 다른 아픔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바로 그 사각지대에 ‘터키’라는 나라가 있다.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역에 있는 나라다. 옛날에는 오스만 투르크라고도 불리웠고, 국사 시간에는 ‘돌궐’이라고도 배웠다. 기독교 처음 교회들의 많은 수가 ‘소아시아’라고 불리우던 터키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2002년에 월드컵 4강에서 만났던 나라, 또는 ‘케밥’의 나라, ‘무슬림들의 나라’ 정도로밖에는 인식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2002년에 월드컵 4강에서 만났던 나라, 또는 ‘케밥’의 나라, ‘무슬림들의 나라’ 정도로밖에는 인식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은 전 세계의 자유진영 국가들에게 SOS를 요청한다. 그 요청에 가장 먼저 응답한 나라가 바로 터키였다. 터키는 한국전쟁에 총 1만 4936명을 파병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들어보지도 못한 먼 동방의 국가에 날아온 터키 군인들 속에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제 인물인 故 슐레이만 하사가 있다.
생면부지의 나라로 떠나는 터키의 젊은이
영화는 슐레이만이 한국 파병의 명령을 받고, 터키를 떠나는 장면을 먼저 묘사한다. 사랑하는 연인의 눈물 어린 원망을 받고, 고향에 있는 부모님들은 직접 만나지도 못한 채로, 그는 먼 길 항해에 나선다.
이 지점에서 관점이 하나 열린다. 우리는 우리의 전쟁이기 때문에 거의 비자발적으로 전쟁에 뛰어들거나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하지만 직접적 관련이 없는 생면부지의 나라의 전쟁에 뛰어들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떤 이에게는 금전적인 보상이, 어떤 이에게는 자국에 대한 충성심이 동기 부여가 되었겠지만, 정든 고향을 떠나 남의 나라의 전쟁에 뛰어든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그 젊은이들이 모두 숭고한 정신을 가졌다고 속단할 수는 없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목숨을 담보하는 것이니만큼 그 젊은이들의 결정은 우리에게 엄청난 ‘사랑의 빚’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포화 속에서 꽃핀 사랑
슐레이만 하사는 작전 도중에 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패닉 상태에 빠진 아이를 발견한다. 아이는 다섯 살 정도의 여자 아이이다. 말을 할 줄 알았겠지만 전쟁의 충격으로 한국어조차도 하지 못한다. 만약 전쟁의 직접적 맥락에 속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그 아이조차도 남인지, 북인지, 자유민주주의 진영인지. 공산주의 진영인지부터 파악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 피아식별의 단계가 끝나야 사살을 하던지, 아니면 아군으로서 돕던지 하는 것이 전쟁 상황의 기본적인 프레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터키 군인, 슐레이만은 그 아이를 그저 도움이 필요한 한 아이로 보았고, 그녀를 돌보기로 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슐레이만은 그 아이를 그저 도움이 필요한 한 아이로 보았고, 그녀를 돌보기로 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보름달처럼 둥글고 귀여운 아이의 모습을 따서, 터키어인 ‘아일라’라고 이름을 붙여준 슐레이만 하사를 아일라(김설 분)는 곧 ‘빠바’(아빠)라고 부른다. 의지할 곳 한 구석 없는 전쟁 상황에서 갑작스레 나타나 자신을 사랑해주고, 돌봐주는 터키 군인. 그녀에게는 그것이 행운이었을 것이다.
쉽게 끝날 것 같던 전쟁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장기전으로 돌입한다. 그만큼 슐레이만 하사와 아일라가 부녀간의 정을 쌓을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난 셈이다. 어떻게 부대 안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이 가능했을까. 슐레이만 하사의 부성애가 가장 큰 동력이었겠지만 (영화가 사실이라면) 전쟁의 맥락에 파묻히지 않은 채로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이들의 마음이 모여진 결과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이들의 마음이 모여진 결과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슬픈 이별
그러던 슐레이만 하사에게도 복귀 명령이 떨어진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터키 군 자체적인 교체가 있었던 것이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이 복귀 명령을 거부하고, 아일라를 돌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슐레이만 하사는 아일라를 당시 전쟁 고아들을 위해 터키가 세운 ‘앙카라 학교’에 맡겨두고 떠나게 된다. 꼭 다시 돌아와서 터키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약속할게. 다시 돌아올게. 다시 돌아오면 그 때는 헤어지지 않을거야.
아빠들은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는거야
약속할게. 다시 돌아올게. 다시 돌아오면 그 때는 헤어지지 않을거야. 아빠들은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는거야
2010년, 서울
영화는 태엽을 빠르게 돌려, 현대의 터키와 대한민국을 비춘다. 터키의 거리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대한민국 땅은 그야말로 상전벽해이다. 영화는 우리를 전쟁 속에 넣었다가 현재의 서울로 우리를 인도한다. 전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 위에 대한민국은 제2의 도약을 했고,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자연스레 알게 한다.
전산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시대. ‘아일라’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찾지 못하고, 60여년을 지내온 슐레이만은 늘 아일라를 그리워한다. 전쟁이 만들어놓은 또 하나의 이산가족. 하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그 이산가족에 대해 누군들 관심가질리 없었다.
그러다가 방송 작가들에 의해 이 이야기가 발굴이 되어지고, 당시 ‘앙카라 학교’에 함께 있었던 노인들이 속속들이 등장한다. 동창들은 60년이 지났지만 아일라를 또렷이 기억한다. 늘 의기소침해 있던 소녀. 하지만 ‘앙카라’로 시작하는 터키 군가를 부를 때면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따라부르던 그 소녀. 이 모습을 아빠가 자랑스러워하실거라며 생기가 돌던 그 소녀에 대해 이제 환갑을 넘긴 동창생들이 증언한다.
※ 실제로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아일라-푸른 눈의 병사와 고아 소녀’ 편을 참조 바람
https://www.youtube.com/watch?v=x4610Zh-uIQ
그렇게 서로 만나게 된 슐레이만과 아일라(한국이름: 김은자). 아일라 역시 이제는 할머니의 모습이 되어 만났지만 그들은 60년전 그 때처럼 아빠와 딸로 서로를 부둥켜 안는다. 영화의 말미에는 실제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화로서의 감동이 더 진하다.
그렇게 서로 만나게 된 슐레이만과 아일라(한국이름: 김은자)
터키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터키 영화
이 영화는 터키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미 우리는 수차례 전쟁의 아픔을 영화로 재확인해왔다. 태극기 휘날리며, 국제시장, 포화 속으로, 고지전, 공동경비구역 JSA, 님은 먼 곳에 등 한국전쟁을 모티브로 한 한국영화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터키 감독에 의한, 터키인이 주연이 된 영화는 처음이다. 먼 나라에 파병을 떠난 터키인의 시선으로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그 안에 남겨진 전쟁고아를 바라보게 하는 이 영화는 진정한 의미의 프레임 전환을 시켜주는 영화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전쟁’을 싸우고 있을 때, ‘그들의 전쟁’을 ‘우리의 전쟁’처럼 싸워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아이’를 ‘우리의 아이’로 품게 되었던 한 군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낯선 아이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종교나 국적이라는 틀을 넘어 인류애를 나누는 것이 가능했던, 이제는 70년이 지난 이야기 속에, 나는 여전히 피아식별이 되어야만 사랑을 논할 수 있는 지금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다른 나라 아이는커녕 나는 길가에 울고 있는 아이에게라도 따뜻한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에 휘말려 일어난 전쟁이었지만 그 진흙탕 속에서도 꽃피었던 사랑의 이야기, 영화 ‘아일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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