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 그리고 ‘1987’의 소환]
이 영화를 논하기전에 필자는 영화 ‘국제시장’과 영화 ‘1987’을 소환해본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각 세대의 트라우마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작업이 선행되어야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의 사회적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쟁 후 70년 정도의 시간동안 격변을 겪은 우리 사회는 크게 3개 정도의 세대로 철저하게 분리되었다. 첫째는 6.25. 전쟁을 통과하여 보릿고개를 넘어 산업의 역군이 되었던 세대요, 둘째는 독재 정권에서 맞서 손에 화염병을 들었던 세대이며, 셋째는 취업과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고 하는 현재의 2030세대이다. 오늘날에는 그 세대간 이해가 부족하여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필자는 영화 ‘국제시장’, ‘1987’, ‘국가부도의 날’의 이해를 통해서 세대와 세대간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고 본다.
[영화로 이해하는 세대(generation) 트라우마]
전쟁을 겪은 세대의 트라우마는 다름 아닌 ‘전쟁’이다. 나의 부모님은 어린 시절 6.25.전쟁을 겪었다. 그 분들이 지금까지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북한군의 남침이다. 필자는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한다. 그들은 공산군이 자신의 가족들, 친구들을 죽이는 모습을 눈으로 보았거나, 귀로 들었거나, 혹은 그러한 일들을 피해서 발로 머나먼 피난길을 떠났던 세대이다. 영화 ‘국제시장’은 그 세대의 아픔을 대변했고, 우리는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었다.
386 세대로 일컬어지는 두 번째 세대의 트라우마는 ‘억압’이다. 군인들이 장악한 정부는 386 세대의 정신과 사상, 문화를 철저하게 억압했다. ‘386’은 자유를 위해 저항했다. 생각할 수 있는 자유, 꿈꿀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손에는 화염병을 들었으며, 독재 타도를 외쳤다. 소극적으로 방관한 이들의 마음 속에도 동일한 트라우마가 남았다. 영화 ‘1987’은 그들의 아픔을 대변했고, 우리는 영화를 통해 그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었다.
이른바 ‘삼포세대’라고 불리우는 현재 20~30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는 무엇일까? 이 지점에서 앞의 두 세대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도 트라우마가 있어?’
전쟁을 겪은 것도, 손에 화염병을 들어본 적도 없는 이 세대. 386은 꿈을 꾸기 위해 저항했는데 이들은 꿈꾸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 아닌가. 안정적인 직업을 찾겠다며 꿈은 한 켠에 세워두고 노량진의 콩시루 같은 강의실에 몸을 담그는 이 세대는 도대체 무슨 트라우마가 있어서 이러는 것일까?
[2030세대의 트라우마]
그도 그럴 것이 현재의 2030세대는 자신들의 삶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자신들의 가치관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거시적 맥락에서 이해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알려주어야 하는데 알려주는 이가 없다. 뜻밖에 ‘영화’가 그런 역할을 그나마 할 수 있는데 이것이 필자가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기대했던 이유이다. 왜냐하면 지금 2030세대의 트라우마는 직접적인 상처를 남긴게 아니라 ‘국가부도사태’와 그에 따른 ‘IMF 사태’로부터 출발해서 서서히 누적되어온 만성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세대보다도 2030세대가 보아야 하고, 스스로의 생각과 가치관의 형성 과정을 돌아볼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7년 말을 회상하는 영화의 세 가지 시선]
영화는 세 가지의 시선으로 1997년 말을 회상한다.
첫 번째는 그 사태를 마주하여 IMF와의 협상까지 진행했던 정부와 관계 부처 당국자들의 시선이다. 그 중심에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으로 등장하는 한시현(김혜수분)이 있다.
두 번째는 국가부도의 위기를 개인적 기회로 만들고자 베팅했던 기회주의자들의 시선이다. 그 대표로 등장하는 인물이 국가의 위기를 이용하여 투기를 조장하는 윤정학(유아인분)이다.
세 번째가 ‘IMF 사태’의 직격탄을 온 몸으로 맞았던 일반적인 민중들의 시선이다. ‘갑수’라는 인물(허준호분)이 그 시대의 모든 서민들을 대변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졌다.
[‘주제’로서의 탁월함, ‘영화’로서의 아쉬움]
영화의 시대적 사명 때문에 너무도 큰 기대를 한 것이었을까. 나는 영화 ‘국제시장’이나 ‘1987’만큼이나 이 영화가 영화로서 잘 만들어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감독님이 지나치게 이성적이었던 것일까? 영화는 마치 교과서를 읽는 것 같은 딱딱함을 제공했다. 영화로서의 아쉬움이 있었던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첫째는 앞에서 말한 세 가지의 시선이 유기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 시대를 회상하기에 필요한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설정했는데 현실적으로도 이 사람들은 서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보니 영화의 종반까지 평행선을 그리며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영화 종반부에서 ‘갑수’가 한국은행을 찾아온다. 그 때 ‘한시현’ 팀장이 갑자기 ‘갑수’에게 ‘오빠!’라고 하는 순간이 유일한 연결점인데 그것조차도 너무 뜬금 없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병렬적으로만 보여주다보니 이야기로서의 몰입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둘째는 세 가지 시선의 무게 중심을 잘못 잡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극을 예로 들더라도 ‘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관객은 이미 그 결말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일한 시대에서 살았을 가상의 인물의 이야기라면 관객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결부시켜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관객이 이미 팩트로 알고 있는, 그것도 새드 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해버렸다. 결국 IMF로 끌려갈 것을 아는 관객에게는 ‘한시현’ 팀장의 외로운 싸움에 큰 몰입을 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전문가로서의 여성(김혜수)과 전통적 젠더 권력에 익숙한 꼰대 남성(조우진)간의 대립 구도가 더 흥미를 끄는 요소였을 것이다.
셋째는 너무나 친절하다는 것이다. 경제 분야를 주제로 하다보니 용어가 어려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감독은 아마도 ‘모라토리움’, ‘금리 인상’, ‘워크아웃’ 등의 경제 용어들이 관객들에게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듯 하다. 그리하여 감정에 몰입하기에도 바쁜 배우들은 경제 용어가 나올 때마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애를 쓴다. 지금 인터넷에는 ‘유아인의 경제 인강’ 짤이 돌아다니고 있다. 상황을 이해하는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로 인해 영화는 ‘극’으로서의 긴장과 몰입을 포기하고 말았다.
[너무도 편한 개돼지, 너무도 힘든 소크라테스]
영화에서 보듯이 군부독재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꽃피우겠다던 ‘문민정부’는 OECD에 가입하는 등 성대한 잔치를 끝내고, 정권 말 닥친 국가부도의 사태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했다. IMF가 터지고 나자 기업과 정부의 책임을 이야기하기보다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던 일부 국민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IMF 사태를 이어받은 ‘국민의 정부’는 이 모든 사태의 해결을 위해 ‘금모으기 운동’을 펼치는데 그 금들은 기업들이 진 빚을 갚는데 쓰였다고 영화는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대중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대중은 속는다. 그 때는 정보가 없어서 속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의 유통 때문에 속는다. 우리는 인터넷이 보편화된, ‘정보의 홍수’라고 불리우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수많은 정보들은 ‘거대권력’이라는 도매상, ‘미디어’라는 소매상을 거쳐서 우리네 식탁 위에 먹음직하게 차려진다.
민중들은 한 교육부 관료의 ‘개돼지’라는 말을 듣고 발끈했었다. 하지만 파면된 그 관료가 조용히 복직했다는 뉴스에는 분노할 틈이 없었다. 민중들은 스스로 ‘개돼지’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깨어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잠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주어진 정보 안에서만 생각하고 사유한다면 우리는 또 속을 수 밖에 없다.
[아쉬움을 넘어선 마지막 10분]
영화는 ‘이야기’로서의 모든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지막 10분을 스크린에 투사한다. ‘국가부도의 날’의 마지막 10분은 ‘보헤미안 랩소디’의 마지막 10분만큼이나 좋았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 10분동안 너무나 명확하고 간절하게 전달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20년이 흐른 현재의 대한민국을 비춘다. IMF를 극복했다는 우리 사회는 어찌된 영문인지 경제적으로도 나아진 것이 없다. 그 당시에 어린 아이였던 ‘갑수’의 아들은 현재의 2030 세대가 되었다. ‘갑수’는 다음 세대의 자녀에게 이와 같이 외친다.
“잘해주는 사람도 믿지말고, 누구도 믿지 말고 너 자신만 믿어!”
재발한 암과 같은 경제 위기에 자신을 찾아온 현직 한국은행 당국자들에게 한시현(김혜수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상 깨어있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것. 두번 지기는 싫으니까요”
영화는 직접적으로 2030세대와 그 후의 세대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조언하고 있다. 어른들이 속았던 것처럼 똑같이 속으면 안된다고 말이다. 그 어떤 권력이나 앞선 세대도 우리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주지는 못한다는 것. 주어진 틀 안에서 사고하고 생각한다면 깨어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잠자는 사람이 된다는 것. 배가 기울어도 어른들은 괜찮다고, 가만히 있으라고 외칠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탈출하라!
[외상(外傷)이 없어서, 사실 더 아픈 2030의 트라우마]
전후 세대와 386 세대는 각각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이제는 확고부동한 기성 세대가 되었다. 화염병을 들고 자유를 찾아 투쟁했던 그들은 손에서 화염병을 내려놓고, 목에 넥타이를 매었다. 여의도 금뱃지를 달기도 하고, 전대협의 홍길동으로 불리우던 이는 어느덧 청와대에 입성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그러나 2030세대가 보기에 386은 전후 세대와는 성격이 다른 ‘꼰대’일 뿐이다. 기존의 세대는 지금 세대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기존 세대는 전쟁을 극복하고, 군부 독재를 몰아내고, 경제 강국을 이루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지금의 2030 세대는 상처 하나 없이 유복하게 자란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2030의 트라우마는 그들의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에 외상(外傷)이 없다. IMF로 시작된 희망의 상실. 열심히 살면 내일은 좀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의 상실. 이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더욱 이해받기 어렵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2030의 트라우마의 근원을 명확하고 간절하게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삼포세대 비긴즈’랄까. 외상이 없어서 사실은 더 심각하고, 더 아픈 2030의 트라우마 말이다.
[우리의 아들, 우리의 딸들에게]
“끊임 없이 의심하고, 경계 없이 꿈꾸라”
이것이 영화를 통해 필자가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픈 말이다.
가정에서부터 생각의 근간을 마련한 후부터는 스스로 정보를 찾고, 개별적으로 삶에 적용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정보 소매상에게서 정보를 얻되 끊임 없이 의심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개인화(customize)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정보의 소비자만 아니라 생산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기존 세대가 설정해놓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다음 세대의 발전은 없다. 그렇기에 아빠, 엄마가 가지 않은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라. 경계 없이 꿈꾸라.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그렇게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의 상처를 일깨워 다음 세대에게 경고한다. 그 경고를 들을지 말지는 순수하게 관객의 몫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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