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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어주는 남자

영화 '알라딘'과 '기생충' 리뷰: '기생충'은 '알라딘'처럼 살 수 있을까?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영화 ‘기생충’의 ‘기택’(송강호 분)의 말과 같이 ‘참으로 시의적절’하다.잔혹한 현실을 그려낸 영화 ‘기생충’과 애틋한 동화를 그려낸 영화 ‘알라딘’이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상영되고 있다. 봉준호 감독과 가이 리치 감독이 짜고 친 고스톱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생각보다 이 영화들에는 연결점이 많다.      

봉준호 감독과 가이 리치 감독이 짜고 친 고스톱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생각보다 이 영화들에는 연결점이 많다.


※ 이후부터는 영화들의 스포일러들과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지지 않은 필자의 울퉁불퉁한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같은 전제, 다른 관점


현실을 그려낸 ‘기생충’ 뿐 아니라 동화를 그려낸 ‘알라딘’에서마저도 ‘계층’ 또는 ‘계급’은 존재한다. 하지만 계층 간의 소통에 있어서 두 영화는 너무나 다른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기생충', 계층 간 단절을 '냄새'와 '공간'으로 형상화하다
‘기생충’은 사회 계층을 ‘공간의 높낮이’로 표현하고 있다. ‘기택’(송강호 분)네 식구들은 지상이기도 하고, 지하이기도 한, 거꾸로 말하면 지상도 아니며 지하도 아닌 공간에 산다. 그 곳은 억수 같은 비가 내리면 물이 새서 잠기고 마는 ‘속수무책의 공간’이다. 반면 ‘기택’네 식구들이 ‘기생’하는 ‘동익’(이선균 분)의 집은 오르막의 끝자락에 위치해있다. 비가 오면 ‘미세먼지가 없어져서 좋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들의 공간은 ‘동네의 꼭대기’일 뿐 아니라 ‘사회 계층의 꼭대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높은 곳에 있는 이’들과 ‘지하에 있는 이’들은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만날 수 없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냄새’라는 소재와 말미에 등장하는 ‘모스 부호’는 이러한 계층 간 단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위 계층의 사람들이 신분상승을 하더라도 특유의 ‘냄새’는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영화는 시종일관 집요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지하에 갇혀있는 자’들이 ‘햇빛이 비치는 세상’과 소통을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모스 부호’는 그 메시지를 해석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이들(다송)에게도 너무 난해하고 미세하다.

 

사회 계층의 꼭대기에 서 있는 ‘동익’은 ‘기택’네 식구들을 본의 아니게 모두 고용한 오너이기도 하다. 그는 젠틀한 외양을 견지하며 (또는 그렇게 노력하며) 살지만 늘 ‘선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운전기사를 자처한 ‘기택’에게 ‘테스트’는 아니라며 편안하게 운전하라고 하지만 ‘동익’의 손에는 차가 가득 담긴 머그잔이 들려 있다. 자신은 상위 계층에서 ‘좋은 사람’으로 존재하면서 하위 계층의 있는 사람들에게 관대함을 견지하고자 하지만, 하위 계층에서 한 발 다가서면 선을 넘지 말라며 바로 정색을 해 버리는, 우리 시대 ‘기득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생충'의 킬링파트: '지하철 냄새'


사람마다 다르게 짚겠지만 이 영화의 킬링 파트는 ‘동익’(이선균 분)의 지하철 발언이라고 본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동익’의 이 발언을 통해서 자신들이 어느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해야할지 감을 잡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 기사님? 선을 잘 지키시는 것 같애. 근데 냄새가 선을 넘지.”“무슨 냄새? 난 잘 모르겠던데.”“몰라. 가끔 지하철 타는 사람들한테서 나는 냄새 있어.”


'연교'(조여정) VS '자스민'(나오미 스캇)


‘알라딘’은 오히려 ‘기생충’보다 노골적으로 계급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보수적인 중세 시대와 ‘아랍’이라는 공간, 그들 특유의 보수적인 문화는 그 어느 시공간의 것들보다도 더 경직된 계층 구조를 소유한다. ‘궁’이라는 공간에서 ‘백성’들을 바라보는 공주의 시선은 그런 의미에서 ‘기생충’의 ‘연교’(조여정 분)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위 계층의 삶을 한 번도 경험을 해 본적이 없는 그녀들은 의도의 불순함은 없지만 하위 계층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런 의지를 가진다고 한들 사회의 계층 구조가 워낙 공고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낀 깊은 구렁을 넘어설 수가 없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녀들의 ‘순수함’만으로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봉준호'는 '사회학자'다       

  
봉준호 감독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그의 전공이 ‘사회학’이었다는 것이 자꾸 떠오른다. 나는 그의 학문이 그의 영화를 만들었다고, 적어도 그의 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그는 그의 영화에서 개개인의 피폐한 삶의 원인에 대해 '특정인'의 탓을 하지 않는다. 지난 영화 ‘설국열차’에서도, ‘살인의 추억’에서도, ‘괴물’에서도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된 원인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지 않다. 이번 영화 ‘기생충’에서도 ‘동익’(이선균 분)은 어느 정도 전형적인 ‘기득권’의 오만함을 드러내었지만 ‘연교’(조여정 분)는 심플하고 순수하며 그 나름대로 배려심이 깊은 캐릭터로 묘사되었다. 사실 현실의 부자들도 마찬가지다. ‘부자’ 중에도 오만한 부자가 있는가 하면 배려심이 깊은 부자도 못지 않게 있는 법이다. ‘지하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부자’로 살아가는 개개인의 악함 때문만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 고통은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계층 간의 단절’의 문제임을 영화는 매우 담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것이 봉준호 감독이 사회학을 공부한, 혹은 개인의 관점과 사회의 관점을 균형있게 고민한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들은 봉준호 감독을 향하여 ‘누구보다 자본주의의 덕을 누리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중인격자’라고 손가락질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로 선동을 하거나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분풀이 대상을 찾는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안돈시켜 자리에 앉히는 사람이다. 적당히 힘을 빼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냉정하게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끼리 아웅다웅 싸울 문제가 아닌 것이다. ‘설국열차’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열차 칸의 구분을 통한 고착화된 계층 구조이다. 그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들의 심리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 영화 ‘기생충’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문제의 근원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 근원의 자리에는 ‘동익’도 ‘연교’도 그의 식구들도 없다. 다만, 벗어날 수 없는 ‘지하’라는 공간과 햇빛이 따스히 비치는 높은 집 사이, 그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있을 뿐이다.      

가만히 보면 많이 비슷한 '알라딘'과 '기우'


다시 ‘알라딘’의 아그라바 왕국으로 와 보자. ‘알라딘’의 삶도 ‘기우'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둑질과 속임, 도망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이다. 그렇게 살면서도 ‘알라딘’은 스스로의 내면은 깨끗하다고 자부한다. 마치 기생충에서 ‘연교’(조여정 분)을 속이기 위해 학위증명서를 위조하면서 ‘아버지! 저는 이게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내년에 이 대학 갈거거든요!’라고 외치는 ‘기우’(최우식 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알라딘’도 ‘기우’도 하고 있는 일에 비해서 ‘내면’이 괜찮은 사람들이다. 게다가 ‘실력’도 괜찮다. ‘알라딘’은 아그라바 왕국의 구석구석을 꾈 정도로 영리하고, 왠만한 체조 선수들보다 훨씬 벽을 잘 탈 정도로 운동신경도 뛰어나다. ‘기생충’의 ‘기우’는 까메오로 출연한 그의 친구 박서준이 인정할만큼 준비된 과외 선생님이다.
“대학 와서 술만 쳐먹는 XXX들보다 너가 더 잘 가르칠걸?”


위조되고 포장된 자아


하지만 ‘기우’는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보이기 위해서 ‘학위증명서’를 위조해야 했다. 기우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실력을 증명할 방법은 ‘인맥’과 ‘학벌’, ‘라이센스’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내면을 숨기고, 철저하게 포장되고 위조된 자아를 가지고 살아간다.
‘알라딘’도 여기까지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한 눈에 반해버린 자스민 공주(나오미 스캇 분)와 실질적인 만남을 갖기 위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바로 ‘왕자’라는 타이틀이다. 심지어 ‘아그라바 왕국’의 성문법에는 ‘공주는 왕자와만 결혼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을 정도이니 보다 노골적인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알라딘’ 역시 ‘기생충’의 ‘기우’와 ‘기정’처럼 가면을 쓰고, 자신을 위조하여 궁에 들어가고야 만 것이다.      
평행을 그리던 '기우'와 '알라딘'의 갈림길
다른 공간, 다른 시대를 같은 시각으로 그리던 두 영화가 갈라지는 지점은 ‘기우’와 ‘알라딘’의 내면과 실력을 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의 태도이다. ‘기우’를 선두 주자로 하여 ‘동익’네 집에 취업한 ‘기정’, ‘기택’, ‘충숙’은 자신들의 본연의 모습을 결코 드러낼 수 없다. 그들의 내면 따위에는 상류 사회의 사람들은 물론, 본인들 스스로조차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기생하여 생존하는 것에만 몰두할 뿐이다. ‘스스로의 계획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는 그들에게는 너무나 사치스럽다. 그 역시도 특정 그룹이나 특정인에게 원인이 있다기 보다는 그들이 사는 세상 전체가 사람의 가치, 내면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알라딘’이 만난 세상은 ‘기생충’의 세상과 다르다. 그가 램프를 문질렀을 때, 튀어나온 파란 거인 ‘지니’(윌 스미스 분)는 소원을 빌면 그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알라딘’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능동적인 존재이다. ‘알라딘’이 사랑에 빠진 ‘자스민’ 공주 역시 내면의 가치를 중시하는 여성이다. ‘돈과 권력의 포장지’와 ‘진심의 가치’를 구별해내는데 공을 쏟는 이 당돌한 아가씨는 왕자로 신분을 위조해 들어온 ‘알라딘’의 ‘포장지’(아바브와 왕국의 알리 왕자)에 관심이 없다. 이러한 자극은 알라딘으로 하여금 점점 더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성찰하게 만든다.

 

‘나는 누구지?’‘나는 비록 도둑질을 하면서 살았지만 따뜻한 마음과 배려심이 있구나.’‘무엇보다 이 여자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구나.’‘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러한 마음들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자스민 공주’의 명쾌한 시그널과 ‘지니’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기생충'은 '알라딘'처럼 살 수 있을까?    자.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하부 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혹은 상부 구조에서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는 우리들은 공주의 마음을 얻은 알라딘처럼 살 수 있을까?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치느라 우리도 모르게 함께 가야 할 존재들과 뒤엉켜 서로 물고 뜯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서로를 향해 산경수석을 내리치던 ‘문광’의 가족과 ‘기택’의 가족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부질 없는 경쟁과 너무도 닮아 있다.      봉준호 감독은 우리의 분노를 식혀주며 잘 생각해보라고 하는 것 같다. ‘기택’의 식구들이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박서준 때문도, ‘문광’ 때문도, ‘동익’ 때문도, 그들 스스로 때문도 아닌 것이다. 언제인가부터 우리 사회는 분노에 차 있다. 먹잇감을 찾아 도사리고 있는 맹수들처럼 우리 사회는 분노를 풀어낼 대상을 찾고 있다. 사실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처럼 카타르시스를 느낄만한 일도 없다. 그렇게 해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서 기득권을 빼앗는 일도 가끔 일어나기는 한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상부를 차지하는 사람들만 바뀌었지 세상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빼앗은 자들도 그 전의 권력자들과 같은 논리에 의해서 또 다시 선을 긋기 시작한다. 결국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상,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지하에 갇혀버린 ‘기택’(송강호 분)이 계단을 올라와서 어느덧 사회의 꼭대기에 올라온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가 ‘동익’의 역할을 해버린다면 사회적인 효용은 제로에 수렴하게 되는 것이다.   

 

‘알라딘’은 그 어떤 시공간보다도 수직적이고 경직된 사회에서 자신의 내면을 발견했다. 이건 그저 ‘동화’라서 가능했던 것일까? ‘램프의 요정’ 정도는 만나줘야 일어날 수 있는 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이란 말인가.


'A Whole New World'


조금 뜬금 없지만 돈 한 푼 없는 나의 가치를 알아봐주고, 결혼까지 해 준 아내가 새삼 대단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현실의 때가 묻어있었더라면 그러한 선택은 하지 않았을텐데. 나에게는 아내가 ‘자스민 공주’이고, 아이들이 ‘지니’ 같은 친구들이다. 그들을 통해서 나는 지하에 쳐박힌 것 같은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본연의 모습과 감정,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것이 내 행복이자 자산이다. 아, 갑자기 진정한 행복의 기운을 느낀다.   
아내와 함께 양탄자를 타고 날아가, 한강을 내려다보며 웰치스 한 잔 하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