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 사상 최악의 연쇄 테러>
2011년 7월 22일 오후,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정부청사에서 폭탄이 터진다. 그리고 얼마 후 오슬로 북서쪽 30km에 위치한 우퇴위아 섬에서 무차별 총기난사 테러가 발생한다. 우퇴위아 섬에서는 집권여당인 노동당의 청소년 캠프가 진행 중이었고, 섬을 오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페리 밖에 없었다. 고립무원의 섬에서 700명이 넘는 10~20대의 청년들이 사자에 쫓기는 노루처럼 공포에 휩싸여 소리치며 도망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슬로와 우퇴위아 섬에서 총 7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모든 테러는 단 한 사람에 의해 실행되었다. 그의 이름은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였다.
<최악의 테러를 영화화한 본 시리즈의 감독>
이 충격적인 사건의 전모, 그리고 노르웨이 사회가 이 충격을 어떻게 치유해나가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낸 영화, ‘7월 22일’이 지난 10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본 시리즈’로 이미 국내에도 많이 알려져있는 ‘폴 그린그래스’가 감독이고, 배우들은 노르웨이 배우들이라고 하는데 마치 그 사건을 실제로 지켜보는 것 같은 몰입감을 제공한다.
<나는 무엇에 충격을 받았나>
이 영화를 별다른 정보 없이 영화를 접하게 되었는데 너무나 많은 생각거리들을 던져주어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 사건을 대하면서 나는 왜 충격을 받았는지를 되짚어본다.
1. 범인이 무차별적으로 아이들을 사살한 이유는 다름 아닌 정치적 이유였다. 그는 스스로를 ‘성전 기사단’의 지휘관으로 여겼으며, 그가 꿈꾸는 세상은 난민과 다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순혈주의였다.(이는 나치즘과 일맥 상통하여 그는 체포 후 재판에서 나치식 경례를 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청사와 집권여당이 주관하는 캠프를 노린 것이고, 어린 학생들조차도 멀지 않은 미래에 다문화정책을 이끌 잠재적 리더로 보아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간 사냥’에 나선 것이었다.
2. 그런데 우퇴이아 섬에서 진행되던 청년캠프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당 지지자들의 모임이 아니었다. 물론 집권당이 주최하는 캠프이기는 하나 때로 그 정당의 기조에 반대하는 이들도 함께 토론이 가능한 열린 캠프였다. 물론 노동당의 기조는 다문화 정책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캠퍼들 중에는 난민이나 아시아인들도 있었다.
3. 범인은 체포 후에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노력했다. 변호사 측에서는 정신감정을 통해서 브레이비크의 처벌을 감경시키고자 하였으나 범인은 오히려 자신은 통제력을 가지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브레이비크에게는 2012년 8월, 노르웨이 법정 최고형인 ‘징역 21년’이 선고되었다.(이는 21년이 지나면 무조건 출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위협이 되는 한, 계속 출소를 미룰 수 있는 무기징역에 가까운 선고이다.)
4. 가장 의아스러운 것은 브레이비크의 변호를 맡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의 이름은 게이르 리페스타드이다. 범인은 체포 후, 본인의 사전에 이름을 알아 둔 변호사를 지명하는데 그가 리페스타드였다. 전 국민적인 공분을 사게 된 사건에 대해서 변호를 맡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리페스타드는 당연히 부정적인 답변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자신의 부인에게 의견을 묻는다. 하지만 간호사를 직업으로 둔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 남자가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온다면 의사는 수술하고 우리 간호사는 그를 돌봐야 해요.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무슨 짓을 했는지, 또는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묻지 않죠. 그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당신의 직업 아닌가요."
‘변호사’라는 직업의 본질에 대해 성찰한 리페스타드는 그의 변호를 맡기로 결심한다. 이 대목은 테러만큼이나 내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온 부분이다. (2018년도에 리페스타드는 ‘나는 왜 테러리스트를 변호했나’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 책도 읽어볼 작정이다.)
5. 이 사건을 대응하는 노르웨이의 자세는 전반적으로 굉장히 침착했다. 사실 헬기만 제때 수급되었더라도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고, 테러 징후를 사전에 발견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도 있었지만 유족들은 총리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유족과 부상자들은 조금씩 삶의 일상으로 돌아왔고,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으며, 총리는 탄핵되지 않고 2013년까지 정권을 이어간다. 영화의 말미에 총리가 책임을 통감하고 유족들에게 사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유족들은 총리의 책임이 아니라 테러범의 책임이라며 총리에게 국정을 잘 수행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6, 범인은 법정최고형을 받았으나 방이 3개가 있는 공간에서 홀로 지낸다고 한다. 2014년 기사에 의하면 그는 ‘대중과 좀 더 소통할 수 있게 해줄 것’, ‘지금 있는 플스2를 플스3로 바꿔줄 것’, ‘더 많은 성인용게임과 안락한 의자나 소파를 제공해 줄 것’ 등을 포함한 12가지의 요구를 하였다고 한다.
<노르웨이 사회와 리페스타드, 그리고 유족들이 던지는 질문들>
영화는 테러의 정밀 묘사를 너무나 잘한 나머지 테러 장면 중에는 숨을 못쉬게 만들다가, 그 테러를 치유해나가는 노르웨이 사회를 비출 때 더 큰 충격을 안긴다. 분노와 불신, 책임론이 당연한 상황에서의 노르웨이 사회의 침착, 평화, 단정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리페스타드 변호사와 그의 아내가 말하는 직업의 본질은 무엇인가? 씻을 수 없는 부상과 마음의 상처를 지니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침착하게 조금씩 회복되어 나갈 수 있었는가? 77명을 죽인 범인의 방에 어떻게 플레이스테이션이 놓여있을 수 있는가?
<사회와 제도에 대한 신뢰, 진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노르웨이 사회가 보여주는 테러에 대한 대응 방식이 무조건 좋다고 본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부러운 것이 있다면 그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함께’ 쌓아온 사회와 제도에 대한 깊은 애착과 신뢰가 있다는 점이다. International Social Survey Programme의 2008년 데이터를 보면 세계 주요 국가 34개국의 국가별 대인신뢰도가 나오는데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신뢰도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귀하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체로 신뢰할 수 있다‘ 또는 ’항상 신뢰할 수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율이 노르웨이의 경우 80%(2위)에 가깝다. 한국은 40%(평균 이하)에 못 미친다.
또한 2008년 자료에 의하면 노르웨이의 사법기관에 대한 신뢰도는 66.1%(34개국 중 2위)이며 한국은 24.7%(평균 이하)이다. 아마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사법농단 등의 사건으로 인해 한국은 더 하락했을 것이다. 국회에 대한 신뢰도에 있어서도 노르웨이는 40.5%의 신뢰도(34개국 중 4위)를 보이는 반면 한국은 4.8%(34개국 중 29위)이다.
즉, 노르웨이 사람들은 사람과 기관을 믿었을 때,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경험을 많이 한 것이고, 한국은 사람과 기관을 믿었을 때, 후회하는 경험을 그만큼 많이 한 것이다. 국회, 기업, 종교단체, 사법기관, 교육기관 누구 하나의 문제가 아니요, 사회 전체가 불신감에 차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한국에서 우퇴위아 사건이 터졌다면?>
영화를 보면서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호’는 전 국민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고, 그 후 수많은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모두 ‘불신’이 모토가 되어 일어난 일들이었다. 배가 기울어가는데도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했던 배의 운영진, 사전에 관리감독을 소홀히 한 정부, 이 배의 실소유주인 사이비 종교단체,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 해수부 등 수많은 불신들을 양산한 채, 세월호는 바다 속에 잠겼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는 서로를 믿을 수가 없다.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가깝다. 사회계약이 이루어지기 이전 상태,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 눈 감으면 코를 베어가기 때문이다. 과연 이렇게 서로 못 믿고 산다면 ‘제도는 왜 필요하고, 국가 기관은 왜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세월호보다도 더 직접적인 범인이 있었던 우퇴위아 사건은 사망자는 더 적지만 내용적으로 더 자극적이다. 하지만 노르웨이인들은 이 범인에게 아늑한 의자와 플레이스테이션을 제공해 주었다. 스스로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변호사는 자발적으로 그를 변호했다. 그는 심지어 법정에서 나치식의 경례를 하기도 했다. 물론 사회적인 분노를 격발시키긴 했어도 그는 노르웨이의 오래 다져진 제도 속에 보호 받고 있으며, 이 보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신뢰가 그립다>
나는 사회학자도 정치학자도 아니여서 딱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북유럽식의 사회와 경제는 우리의 역사와 정서와 거리가 너무 멀기에 함부로 따라했다가는 엄청난 혼란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
다만 나는 그저 신뢰가 그립다. 나는 신을 믿는데, 사회와 사람, 제도를 못 믿는다. 그래서 서로를 믿고 사는 북유럽 사람들이 조금 부럽다. 그것을 가지기 위해 수백년간 쌓아온 것이 있을테니 쉽게 따라할 수 없는 건 알지만 그래도 조금은 부럽다.
따라하지는 못해도 부러워 하는 것은 자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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