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세 개의 삶을 산다. 공적인 삶, 개인의 삶, 그리고 비밀의 삶
이것은 최근에 보았던 한 영화에서 하나의 기둥처럼 세워져 있던 명제이다.
이 영화는 서로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친구들의 삶을 스크린 위에 올려놓고는 핸드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맹렬하게 '공적인 삶'과 '비밀의 삶'의 간극을 고발하기 시작한다.
* 늦은 후기이긴 하지만 아직 영화('완벽한 타인')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들어있을 수 있으니 이후부터는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 속 예진(김지수 분)과 수현(염정아 분)은 오래된 단짝 친구이지만 수현에게 걸려온 지인의 전화 속에서 예진은 그저 좋은 집으로 이사간 '재수 없는 년'에 불과하다. 변호사 태수(유해진 분)에게는 매일 밤, 자신의 은밀한 사진을 보내는 여성이 존재한다. 준모(이서진 분)에게는 어리고 아리따운 여자 친구 세경(송하윤 분)이 있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관객들은 세경은 그저 표면적으로 드러난 연인일 뿐임을 차차 알게 된다. 교사로 재직했던 경호(윤경호 분)는 사실 '게이'다. 그리고 '게이'라는 것과 관계 없이 다른 남자 친구들이 골프를 치러 갈 때마다 소외를 당한다.
우리는 비밀을 지니고, 아무렇지 않은 듯 산다
가장 소름 끼치는 대목은 마지막 장면이다. 각자의 '비밀의 삶'이 쉬지 않고 폭로되던 영화의 마지막, 영화 '인셉션'에서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팽이가 돈다. 현실이라면 그 팽이는 언젠가 동력을 잃고 쓰러져야 할 터인데, 팽이는 멈추지 않는다. 사실상 그 폭로전은 하나의 '판타지'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치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현실을 보여주는 스크린. 그 안에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예진과 수현은 언제 그랬냐는듯 우정을 과시하며 태수는 아내와 함께 집에 도착해서 자신의 공간에서 은밀한 사진을 전송받는다. 준모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내연녀의 전화를 무시한 채, 공식적인 여자친구와 행복한 드라이브를 즐긴다.
영화의 킬링 파트는 사실 비밀이 마구 폭로되는 시퀀스라기보다는 그러한 비밀을 안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는 결말일 것이다. 물론 영화적 재미를 얻기 위해 여러 극단적인 설정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영화 속 화자인 태수가 말하듯 사람들은 누구나 '공적인 삶'과 '개인의 삶', 그리고 '비밀의 삶'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러한 결말은 더욱 현실감이 있을 수 밖에 없고, 소름끼칠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이 영화의 리뷰에는 '연인'끼리는 보지 말라는 경고 문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또 믿고 있는 상대방의 모든 '속마음'과 '비밀의 영역'들을 다 알게 된다면 그 관계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영화는 꽤나 도전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속에 있는 것 다 말하지 마"
속에 있는 것 다 말하지 마.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그 말을 해 줄 수 있어야 해.
우리가 어쩌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종류의 말일지 모르겠다. 사회는 나의 진짜 모습을 알기를 원하는 곳이 아니다. 그저 나의 어떠한 일부분이 사회적 기능과 부합할 때, 나에게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올 뿐이다. 그래서 사회적인 욕심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흐름 속에서 각 상황과 맥락에 필요한 자신의 모습들을 극대화시켜서 꺼내놓게 마련이고, 불필요한 모습들은 한 구석에 숨겨두기 마련이다.
SNS는 어쩌면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을 온라인에 집대성 해놓은 공간일 수도 있겠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것들로만 가득한 그 곳은 '상대적 박탈감'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실제로 행복하지 않지만 행복해보이는 무언가를 업로드한 유저가 있다면 그도 실제 자신의 모습과 온라인의 괴리 때문에 공허하고, 그 행복해보이는 무언가를 시청하는 유저는 자신에게 없는 행복이 누군가에게 있다고 인식되어 공허하다.
'공적인 삶'과 '비밀의 삶', 그 간극을 좁혀내는 것
이러한 피상적인 관계와 공허함이 쌓일수록 사회적 피로도는 증가한다. 어느 순간에는 나 자신의 본래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사람들이 원하는 나'만 남아 허울만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것 같은 깊은 허무함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공적인 삶'과 '비밀의 삶'의 간극을 최대한 좁히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분식회계'를 하는 사람의 피로도보다 있는 그대로 회계 장부를 작성하는 회계사가 훨씬 정서적으로 건강한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자신의 삶을 이렇게 심플하게 그리고 순수하게만 대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만 않는다면 이보다 건강한 사회 생활이 어디 있을까.
'비밀의 방'
영화의 시선이 내가 아닌 타인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며 자아성찰을 갖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정말 친한 친구의 경우, 카더라 통신이나 디스패치 같은 뉴스에 나오는 경우, 또는 속한 공동체에서의 징계 공문을 접하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남의 '비밀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어쩌다 남의 비밀의 삶을 알게 되었을 땐, 엄청난 비난과 모욕적인 발언들을 쏟아내곤 한다. 그래서 정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기회는 생각보다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가장 잘 알고 있는 비밀은 자기자신에 대한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비밀의 방', 가끔은 나조차도 들어가기 싫어서 스스로에게도 출입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그래서 자신조차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들여다보지 못한, 그러한 방들이 각자에게 존재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나는 누구인가? 그런 스스로의 '비밀의 방'에 들어갔음에도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억지 '면죄부'나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러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별 헤는 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던 어떤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비밀의 삶을 능청스럽게 잘 운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조금의 은밀한 공간도 허용할 수 없어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다.
세상은 전자의 사람을 지혜롭다 하고
후자의 사람을 융통성이 없다고 손가락질할지 모르나
나는 후자의 사람들의 순수성을 잘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나 스스로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수함에 대한 지향
최선을 다해서 '비밀의 방'을 청소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나'와 모든 사람이 보는 곳에서의 '나'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해서 기울여 나가야 할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아빠의 비밀의 방에 부지(不知) 중에 들어오더라도
별로 놀랄 것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아빠로서의 당찬 소망이라 하겠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서 '비밀의 삶'이 없어진다면
'완벽한 타인' 같은 영화는 너무나 재미 없는 영화가 되어버리겠지만,
그 대신 '동주'가 천만 관객 흥행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순수함을 동경하는 바보 아빠의 글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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