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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어주는 남자

영화 '바이스'와 '미성년' 리뷰: 응답하라, 어른들은.

영화 '바이스'의 한 장면, 도널드 럼스펠드의 박장대소

 

최근에 개봉한 영화 ‘바이스’에는 두 핵심 인물이 나온다. 

조지 W.부시 대통령 시절에 국무장관을 맡았던 도널드 럼스펠드와 부통령을 맡았던 딕 체니이다. 사실 이들은 조지 W.부시가 부임하기 30년전인 닉슨 대통령 시절에 처음 만났다. 도널드 럼즈펠드는 이제 막 정치에 입문한 딕 체니를 발탁하여 자신의 의도에 맞게 활용하고 있었다. 딕 체니 입장에서는 일종의 OJT 교육을 도널드 럼스펠드로부터 받고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 이후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글에서의 실제 인물들에 대한 시각은 필자의 시각이 아닌 영화의 시각임을 미리 밝힙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을 움직이던 실세는 안보 보좌관이었던 키신저였고, 대통령과 키신저는 캄보디아의 습격을 놓고 밀실에서 논의를 한다. 이것을 지켜보던 정치 신인 딕 체니가 럼스펠드에게 묻는다. 닉슨과 키신저의 대화가 어떻게 결론이 나느냐에 따라 캄보디아 국민들의 목숨이 좌지우지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딕 체니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건 뭐죠?(What do we believe?)

 

그렇게 웃긴 질문은 처음이라는 듯, 딕 체니의 질문에 대해서 도널드 럼스펠드는 게걸스럽고, 과장되게 박장대소한다. 그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던걸까?

 

'신념'을 갖는 일

 

‘신념’을 갖는 일. 

사실 그것은 사회초년생인 딕 체니에게 그렇게 웃어넘길 질문이 아니었다. 어떤 의사결정을 하든간에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를 먼저 정해놓지 않으면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딕 체니 뿐 아니라 어떤 조직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이, 아니 인간이 처음 가정에 속해 걸음마를 뗄 때부터 던지기 시작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다진 후, 그 ‘신념’이라는 바탕 위에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실천’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네 ‘삶’인 것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도널드 럼스펠드는 어쩌면 그런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주니어들에게 ‘생각 따위 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시니어들을 대표하는지도 모른다.

 

골치 아픈 신념에 관한 질문

 

군대에 가면 흔히 사회의 물을 뺀다고 하면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고참들이 자주 한다. 말단에 있는 병사가 자꾸 ‘생각’을 하고, ‘가치관’을 품게 되면 수직적인 명령 하달에 움직여야 하는 군대 조직에 큰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애리조나’에서 유학을 하다 왔든, ‘땅끝마을’에서 농사를 짓다 왔든 같은 생각과 같은 말, 같은 걸음걸이를 써야 한다. 생각이 많던 나는 그 작업이 쉽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득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생각이라는 것을 비우고, 내 삶의 시간 속에 조직의 가치를 투영해서 살아보는 경험이 필요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보니 삶이 가볍고, 어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내 가치 체계에서 핵심 부분에 있는 가치와 군인으로서의 가치가 충돌할 때에는 무척이나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대의 경험을 통해서 어쩌면 상부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가장 골치 아플 수 있는 일이 바로 수직적인 조직의 하부에서 '가치'와 '신념'을 묻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종종 그것을 경험하곤 한다. 

 

영화 '미성년', 아이들의 질문에 도망치는 어른들

 

영화 ‘미성년’은 보다 섬세하고 절제된 톤으로 이러한 상황을 보여준다. 자신의 아빠가 인근 오리집 사장님과 불륜 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 주리(김혜준 분), 그리고 새드 엔딩이 불보듯 뻔한 감정을 붙잡고 있는 엄마를 안타깝게 여기는 윤아(박세진 분)는 한 학교에 다니는 동급생이다. 쉽게 말하면 주리네 아빠와 윤아네 엄마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상황. 이들은 처음에는 각자의 분노를 서로에게 향하여 표출하다가 윤아의 엄마(김소진 분)의 출산을 계기로 서로의 아픔을 품는 성숙함을 보인다. 

주리는 불륜이 아직 현재 진행 중인 아빠와의 진심 어린 소통을 시도하지만 아빠(김윤석 분)는 딸이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딸에게서부터 도망친다. 자신의 혼외 자녀를 보러 병원에 온 대원(김윤석 분)은 주리가 ‘아빠’라고 외치자 에스컬레이터를 역주행해서 도망치기 바쁘다.

 

윤아 역시 그녀의 엄마의 무책임한 출산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태어났으나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채, 불륜남에게 ‘나 사랑해?’를 묻는 미희(김소진 분) 대신 윤아는 남동생의 출생 신고부터 앞으로의 부양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을 이름도 나이도 기억하지 못하는 친아빠를 찾아가서 부양할 재정까지 구걸하며 말이다.

두 영화의 공통점

 

영화 ‘바이스’와 ‘미성년’을 비슷한 시기에 보아서일까. 나는 이 영화들의 장면들이 묘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신념과 가치를 묻는 주니어들의 질문에 대답 없이 웃어버리거나 도망가버리는 시니어들의 모습은 사실 지금 우리 어른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영화 미성년의 말미, 두 여고생은 자신들의 아빠, 엄마의 불륜 행각의 장소 혹은 추억의 장소에 나란히 앉는다.  

 

우리 아빠도 내 나이 때는 
자기가 나이 들어서 바람 피울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육아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관성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에게 일관된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아빠, 엄마가 가르친대로 일관성 있게 살아내지 못할 때, 아이들은 혼란스럽다. A, B, C 상황에서 부모는 일관되게 1번을 택해왔는데, D라는 상황이 왔다고 해서 2번을 택하면 아이들은 혼란에 빠진다. 부모는 D라는 상황에서도 1번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불가피하게 2번을 택했다면 왜 2번을 택해야했는지를 설명해내어야 할 것이다. 

 

주니어들은 일관성을 보면서 시니어의 신념을 습득한다. 또한 시니어들의 설명을 필요로 한다. 왜 이래야 하는지, 우리의 신념을 무엇인지. 그 설명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청춘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일관성이 생략된다. 일관성이 깨진 경우에라도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생략된다. 이렇게 일관성과 설명에 있어서의 좌절이 반복된 주니어는 또 다른 일관성 없는 시니어가 되어간다. 그래서 그 다음 세대가 ‘우리가 믿는게 뭐죠?’라고 물었을 때, 대답 없이 회피하거나 크게 웃어버리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좋은 어른'이 부재한 영화들에게서 '좋은 어른' 찾기

 

과연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가?

나는 '신념'에 관한 답을 줄 수 있는 어른인가?

나의 평소 행동은 다음 세대에게 설명 가능한 행동인가?

우리가 믿는 것 혹은 믿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들이 올바르게 사고하고자 애쓰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나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관심이 있다면 이 두 영화를 추천한다.

물론 그 영화들에 좋은 어른들은 별로 등장하지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