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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어주는 남자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리뷰: 공간의 상실에 추억마저 잃을뻔한 20세기 소년들

사랑의 흔적이 함께 했던 '공간'과 '음악'에 남던 시절

 

지금이야 마음에 드는 이성의 ‘번호’를 받는다지만 다시 만날 ‘공간’을 기약해야 관계가 진전되던 때가 있었다. 요즘 세대의 사랑의 흔적은 '핸드폰'에 남는다지만 90년대의 사랑의 흔적은 함께 했던 ‘공간’과 함께 듣던 ‘음악’에 남았었다. 영화 ‘유열의 음악 앨범’은 ‘건축학 개론’이 불러일으켰던 첫 사랑의 향수를 공간과 음악이라는 소재를 사용하여 극대화시킨다.

 

1994년도에 스무살을 맞았던 미수(김고은 분)와 현우(정해인 분)도 그러했다. 그들은 ‘유열의 음악앨범’이 처음 시작하던 1994년 10월 1일, 처음 만났다. 그들이 처음 만난 공간은 동네에 늘상 하나씩은 있던 작은 동네빵집, 이제는 프랜차이즈 독과점에 의해 거의 자취를 감춘 공간이다. 

 

※이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동네빵집을 가득 메웠던 라디오 시그널과 유열의 목소리, 그리고 첫 만남

 

현우(정해인 분)는 그 날, 소년원에서 출소했다. 현우는 두부를 사먹으려고 했는데 왜 빵집에 들어왔을까. 이유야 어찌됐든 그 빵집이라는 공간을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가득 메운다.

 

“방송, 사랑, 비행기. 이 세가지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출발할 때 에너지가 가장 많이 든다는 겁니다”

 

어려서부터 빵을 싫어했지만 돌아가신 엄마의 빵집을 물려받아 친언니와 다를 바 없는 은자(김국희 분)와 함께 일하는 미수에게도, 소년원에서 세상으로 나갔을 때, 단 하나라도 달라지는 것이 있게만 해달라’며 알 수 없는 초월적 존재에게 계속 빌었던 현우에게도, ‘유열’의 생소한 목소리와 서로의 모습이 연합되어 메아리친다. 

 

공간 음악은 그렇게 본인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게 사랑의 새싹을 틔워낸다. 현우가 소년원에서 빌었던 것처럼 정말 세상에 나왔더니 달라진 것이 있었다. 바로 9시에 시작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DJ. 그에게는 기도의 응답과도 같았던 '유열의 음악앨범'의 첫 라디오 시그널은 미수에게도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 된다. 매일 아침, 빵집을 메우는 힘찬 라디오의 시그널 속에 그들의 사랑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느리게 가는 묵직한 배처럼 조금씩 나아간다

 

 

디지털이 아닌 시공간에 매여있었기에 안타깝고, 애틋했던 그 때

 

지금이야 핸드폰 번호만 누르면 헤어진 남자친구에게도 얼마든지 전화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90년대의 청춘들에게는 그러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못했었기에 애타는 사연들이 더 많을게다. 현우가 군대 가기 전 날 밤, 이제는 문을 닫아버린 ‘미수빵집’ 앞에서 다시 재회한 그들은 미수의 집에서 함께 밤을 보내며 그동안의 그리움을 확인하지만 풋풋한 첫 뽀뽀에 차가운 이성이 마비되었는지 다시 만날 계획을 체계적으로 세우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현우가 잠든 사이 미수가 PC통신 ‘천리안’으로 현우의 메일을 만들어주었는데, 아이디만 알려주고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은 것. 이 한 번의 실수로 이 커플 아닌 커플은 군대 복무 기간 전체를 만나지 못하고 엇갈리게 된다. 

 

이들이 결국 엇갈림을 뒤로 하고 제대로 사랑을 나누는 때는 무려 첫 만남에서 10년이 넘게 지난 2005년, 서른 한 살이 되었을 때다. 현우가 군대에 있을 때야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90년대의 청춘이라서 겪는 운명의 장난이라지만 전역 후에 다시 만난 이들을 갈라놓았던 건 현우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과거의 흔적(소년원에 가게 만들었던 트라우마와도 같은 실수, 그리고 그 실수에 연대해있는 친구들)과 미수가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공간의 상실에 추억마저 잃을 뻔한 '20세기 소년'들

 

영화는 이들이 십 년 넘게 엇갈리는 사이, 공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빵집이 있던 동네는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가 들어섰고, 빵집이 있던 자리에는 부동산이, 옆에는 편의점이 들어와 2000년대의 풍경을 자아낸다. 

그렇게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 사이, 현우는 과거의 행복했던 시간을 잡아두려 애를 쓴다. 빵집이 철거되기 전, 그는 홀로 미수 없는 빵집에 와서 사진을 찍는다. 그는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싶은데, 막상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는 그 기억이 너무 실제 같지 않아서 붙잡아두고 싶어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예전 97년도의 미수가 살던, 이제는 2005년을 사는 현우의 집에는 그렇게 찍힌 사진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 둘은 서른이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현우의 집에서 수일을 함께 보내며 그동안 쌓였던 서로에 대한 사랑, 그리움, 깊은 마음들을 쏟아낸다. 

세상은 변화하지만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것들이 있기에 그것을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지난 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 주변의 공간들은 너무나 쉽게 변화했다. 내가 살던 정릉이나 길음동의 동네에는 더 이상 내가 살던 집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살았었다고 추정되는 공간에는 고개를 한참 들어야 그 끝을 볼 수 있는 아파트들이 웅장하게 서 있다. 21세기에는 공간을 메우던 감성이 디지털로 한순간에 건너가버렸다. 그러다보니 아마 현우와 같은, 사랑과 함께 찾아온 음악과 공간들, 어찌보면 사랑과 분리할 수 없는 그것들을 어떻게든 붙잡아놓고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우와 같은 사람들에게 ‘유열의 음악 앨범’은 그 시절의 공간, 그 시절의 음악, 그 시절의 감성을 완전히 소환시킴으로서 빠르게 변화했던 90년대와 2000년대의 아쉬움을 달랜다. 그 때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는 귀한 줄 몰랐던 것들이 많다. 예컨대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려 연결된 전화 한 통의 소중함, 태진아와 서태지가 공존하던 가요 프로그램의 다양성과 역동성. 한정된 필름 수량 때문에 셔터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누를 때의 애틋함이라던지. 삐삐가 울리고 나서 사서함을 확인할 때의 설렘이라던지. 

 

지금은 연결만큼 쉬운게 없다보니 귀한 줄 모르지만, 그 시절 사람과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는 ‘공간’의 연결이 먼저 필요했었다. 그리고 디지털의 문명을 누리지 못할수록 사랑의 감정은 그 공간들과 함께 천천히 그리고 깊이 있게 진전되었다.

현우의 기억 속 ‘미수빵집’에는 미수도 있지만 ‘은자’도 있다. 은자의 ‘난 너 믿는다’는 말 한마디는 현우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미수와의 사랑과 은자의 신뢰가 서려있는 90년대의 '미수빵집'은 그렇기에 현우에게는 인생의 정점을 찍었던 공간이다. 그런 공간의 상실은 어쩌면 현우 뿐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수많은 어른들의 슬픔과 애틋함일 것이다. 

 

'20세기 소년' 또는 '소녀'들에게 큰 선물과 같았던 영화

 

아내와 극장을 나오며 우리가 함께 걷던 그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왜 사랑은 잘 지어진 멀티컴플렉스가 아니라 골목길에서 싹트곤 했을까. 아내를 바래다주던 그 길에 있던 구멍가게와 까페는 여전히 거기에 있을까. 여전히 90년대의 발라드가 마음 속에 남아있는 사람으로써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내용의 개연성과 배우의 어떠함을 떠나서 '20세기 소년 또는 소녀'들의 상실감을 '공간과 음악의 재현'으로 메워주었다는 점에서 참 고마운 선물이다.

 

조만간 아내와 함께 걷던 신촌의 거리를 다시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다.